백두대간 마구령과 고치령에서 즐기는 캠핑여행
여행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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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2.14 00:38
마구령 고치령남진하던 백두대간이 태백산을 지나 서쪽으로 방향을 틀면서 국토의 중앙부에 소백산이라는 명산을 펼쳐 놓았다. 충북과 경북의 경계로서 높고 험한 산맥을 이루고 있는 이 일대는 과거 삼국시대 삼국의 치열한 각축장이었으며, 이후로 험산준령을 넘는 여러 고갯길이 뚫렸고 그로부터 소백산은 장벽으로서가 아닌 영남과 경기, 충청의 문물교류가 이어지는 교통의 요지로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선비촌유교문화 발상의 중심지로서 옛 선비정신을 계승하고, 선현들의 학문 탐구와 전통생활 모습의 재현을 통하여 관광자원화하고, 미래지향적인 관광산업의 발전을 도모하며, 우리 전통적 고유사상과 생활상의 체험 교육장으로 활용하고자 한다.
점심식사(순흥전통묵집, 선비촌종가집)[순흥전통묵집]u003cbr /u003e
옛날부터 전래되어 내려온 전통적인 방법으로 메밀묵을 제조하여 본래의 맛을 간직한 채 묵과 조밥이 함께 어울려 내는 맛은 일품이며, 고향의 맛을 풍기는 메밀묵이다. u003cbr /u003eu003cbr /u003e
[선비촌종가집]u003cbr /u003e
한국관광의 별로 선정된 영주선비촌 입구 저잣거리에 있으며 선비촌의 대표적인 음식점이다. 이 집 영주청국장은 지역 특산물인 부석태를 이용하여 만들어 콩이 굵고 고춧가루를 사용하지 않아 담백하고 구수한 맛이 일품이며 무엇보다 1인분씩 뚝배기에 담아 나와 위생적이다.
옛날부터 전래되어 내려온 전통적인 방법으로 메밀묵을 제조하여 본래의 맛을 간직한 채 묵과 조밥이 함께 어울려 내는 맛은 일품이며, 고향의 맛을 풍기는 메밀묵이다. u003cbr /u003eu003cbr /u003e
[선비촌종가집]u003cbr /u003e
한국관광의 별로 선정된 영주선비촌 입구 저잣거리에 있으며 선비촌의 대표적인 음식점이다. 이 집 영주청국장은 지역 특산물인 부석태를 이용하여 만들어 콩이 굵고 고춧가루를 사용하지 않아 담백하고 구수한 맛이 일품이며 무엇보다 1인분씩 뚝배기에 담아 나와 위생적이다.
영주 소수서원경북 영주시 풍기읍에서 부석사 쪽으로 조금 가면, 길 오른편에 소수서원이 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사액서원이다 서원은 선현을 배향하고 교육하는 조선조 사립 교육기관으로 선현의 영정을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사당, 학문을 배우고 논하는 강학당, 학생들이 기숙하는 재가 기본 시설이다. 소수서원은 1543년풍기 군수였던 주세붕이 흠모하던 회헌 안향의 사당을 숙수사지에 세우면서 시작된다. 초기의 이름은 백운동 서원이었으나, 이 후 퇴계가 풍기 군수로 부임 하면서 나라의 합법적인 인정을 요청했다.
성혈사성혈사(聖穴寺)는 경상북도 영주시 순흥면 덕현리 277번지 소백산(小白山)에 자리한 대한불교조계종 사찰이다.
나한전에는 매우 우수한 기법으로 조각된 조선시대의 나한상이 봉안되어 있어 성혈사가 예로부터 나한 신앙 도량이었음을 나타내주고 있다. 또한 나한전 역시 조선시대 중기에 지은 건물인데, 건축기법도 우수할 뿐만 아니라 출입문에 새겨진 정교하고 아름다운 무늬는 사찰 문 장식품 가운데 가장 뛰어난 것 가운데 하나로 꼽힐 정도로 시선을 사로잡는다.
나한전에는 매우 우수한 기법으로 조각된 조선시대의 나한상이 봉안되어 있어 성혈사가 예로부터 나한 신앙 도량이었음을 나타내주고 있다. 또한 나한전 역시 조선시대 중기에 지은 건물인데, 건축기법도 우수할 뿐만 아니라 출입문에 새겨진 정교하고 아름다운 무늬는 사찰 문 장식품 가운데 가장 뛰어난 것 가운데 하나로 꼽힐 정도로 시선을 사로잡는다.
부석사부석사는 신라 문무왕 16년(676) 해동 화엄종의 종조인 의상대사가 왕명으로 창건한 화엄종의 수사찰이다. 대사가 당나라에 유학하고 있을 때 당 고종의 신라 침략 소식을 듣고 이를 왕에게 알리고, 그가 닦은 화엄의 도리로 국론을 통일하여 내외의 시련을 극복하게 하고자 귀국하여 이절을 창건하였으며 우리나라 화엄사상의 발원지가 되었다.
영주 순흥 벽화 고분1985년 1월 문화재관리국과 대구대학교가 함께 발굴 조사한 이 벽화 고분은 사적 제313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학술적, 문화재적으로 매우 귀중한 자료이다. 이 고분의 축조연대는 고분의 현실 남쪽 벽에 쓰인 기미중묘상인명이란 글씨를 통하여 대략 539년쯤으로 추정되고 있다. 내부구조는 연도가 마련된 석실분으로서 연도를 통해 들어가면 시신을 모신 현실이 있고, 이 현실의 동쪽으로 관을 올려놓았던 관대가 비교적 높게 마련되어 있으며, 아울러 규모가 작은 보조관대도 현실의 서북 모서리에 마련되어 있었다.